영국령 온두라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영국령 온두라스는 현재 벨리즈의 옛 이름으로, 1862년 영국이 식민지로 선포한 이후 1981년 독립할 때까지 존재했다. 초기에는 마야 문명과 영국, 스페인의 갈등, 마야인의 저항이 있었고, 1862년 정식 식민지화 이후에는 경제 발전과 사회 변화를 겪었다. 특히 20세기 초 대공황과 허리케인으로 경제가 어려움을 겪었으며, 노동 운동과 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나면서 자치와 독립을 위한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 독립 과정에서 과테말라와의 영토 분쟁이 있었으나, 1981년 9월 21일 벨리즈로 독립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영국령 온두라스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 영국령 온두라스 |
일반 명칭 | 벨리즈 |
상태 | 영국의 왕령 식민지 |
위치 | 중앙아메리카 |
존속 기간 | 1783년 - 1981년 |
이전 상태 | 과테말라 총독령 |
이후 상태 | 벨리즈 |
지리 | |
면적 | 22,966 km² (1981년 기준) |
역사 | |
주요 사건 | 베르사유 조약 (1783년): 1783년 시작 왕령 식민지: 1862년 자치 정부: 1964년 1월 1일 명칭 변경: 1973년 6월 1일 독립: 1981년 9월 21일 |
정치 | |
정치 체제 | 영국의 식민지 |
대표 | 총독 |
통치자 | |
군주 | 조지 3세: 1783년 - 1820년 조지 4세: 1820년 - 1830년 윌리엄 4세: 1830년 - 1837년 빅토리아 여왕: 1837년 - 1901년 에드워드 7세: 1901년 - 1910년 조지 5세: 1910년 - 1936년 에드워드 8세: 1936년 조지 6세: 1936년 - 1952년 엘리자베스 2세: 1952년 - 1981년 |
인구 통계 | |
인구 | 25,635명 (1861년) |
언어 | |
공용어 | 영어 스페인어 벨리즈 크리올 가리푸나어 마야어 |
화폐 | |
통화 | 영국령 온두라스 달러 |
국기 및 국장 | |
![]() | |
![]() | |
국가 | |
국가 | God Save the King/Queen sound_file: United States Navy Band - God Save the Queen.ogg caption: 국가 |
수도 | |
수도 | 벨리즈시티 (1862–1971) 벨모판 (1971–1981) |
2. 역사
영국령 온두라스가 독립을 이루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영국 정부는 1960년대 초까지 식민지 자치에 소극적이었으며, 이웃 과테말라는 역사적 조약 해석을 근거로 영국령 온두라스 전체 영토에 대한 영유권을 지속적으로 주장하며 독립의 큰 걸림돌이 되었다.[4] 이 영토 분쟁은 18세기 영국과 스페인 간 조약에서 비롯되어 19세기 영국-과테말라 조약을 거치며 복잡하게 전개되었고, 20세기 들어 과테말라가 조약 불이행을 이유로 영유권을 재차 주장하면서 갈등이 심화되었다.[4] 영국은 1961년부터 점진적으로 자치권을 확대하고 1973년에는 식민지 명칭을 벨리즈로 변경하는 등 독립을 준비했지만, 과테말라와의 협상은 번번이 결렬되었다.[4][10][11][12] 결국 벨리즈는 국제 연합 등 국제 사회의 지지를 통해 1981년 독립을 달성했으나, 과테말라와의 영토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4][10]
2. 1. 마야인의 저항과 이주
18세기 후반, 영국인 정착민들이 마호가니 벌채를 위해 내륙으로 점차 활동 범위를 넓히면서 토착 마야인들과의 충돌이 잦아졌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식민지 안팎의 여러 사건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마야인들의 상황은 크게 변화했다.[4]특히 1847년부터 1855년까지 이어진 유카탄 카스트 전쟁은 해당 지역 인구의 절반 가까이 감소시킨 참혹한 분쟁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수천 명의 마야인들이 영국령 온두라스로 피난했다. 그러나 1855년 영국 식민지 입법 의회는 소수의 대지주들에게 광대한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하면서도, 마야인들에게는 토지 소유를 허용하지 않았다. 마야인들은 오직 토지를 임대하거나 지정된 보호 구역 내에서만 거주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난 온 마야인 대부분은 소규모 농민이었으며, 1857년경에는 북부 지구(현재의 코로잘 및 오렌지 워크 지구)에서 상당량의 설탕, 쌀, 옥수수, 채소 등을 재배하며 정착했다. 당시 코로잘 마을은 건설된 지 6년 만에 인구 4,500명으로 성장하여, 7,000명이 거주하던 벨리즈 타운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정착지가 되었다. 한편, 북부 지역의 분쟁을 피해 왔지만 영국 신민이 되기를 거부한 일부 마야인들은 북서부 목재 채취 지역 너머의 외딴 얄백 힐스(Yalbac Hills)에 자리를 잡았다.[4]
1862년경, 약 1,000명의 마야인들이 얄백 힐스 지역의 10개 마을에 정착했으며, 산 페드로가 그 중심지였다. 이들은 영국 식민 통치에 저항했는데, 1866년 마르코스 카눌(Marcos Canul)이 이끄는 마야인 집단은 브라보 강(Bravo River)의 마호가니 캠프를 공격하여 포로 석방과 토지 임대료 지불을 요구했다. 이에 서인도 연대(West India Regiment, WIR) 소속 영국군 분견대가 산 페드로로 파견되었으나, 그해 말 마야인들에게 패배했다. 1867년 초, 영국은 300명 이상의 WIR 병력을 동원하여 얄백 힐스를 공격하고 여러 마야 마을과 식량 창고를 파괴하며 마야인들을 몰아내려 했지만, 마야인들은 다시 돌아왔다. 1870년 4월, 카눌과 그의 부하들은 코로잘로 진격하여 마을을 점령하기도 했다.[4] 2년 후인 1872년, 카눌과 150명의 병력은 오렌지 워크의 영국군 병영을 공격했다. 몇 시간의 격전 끝에 카눌 부대는 후퇴했으며, 이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은 카눌은 1872년 9월 1일에 사망했다. 이 전투는 영국령 온두라스 식민지에 대한 마야인들의 마지막 대규모 공격으로 기록되었다.[4]
1880년대와 1890년대에는 과테말라에서 강제 노동을 피해 모판(Mopan)과 케크치(Kekchi) 마야인들이 영국령 온두라스 남부로 이주해 왔다. 이들은 주로 톨레도 구의 산 안토니오(San Antonio) 주변 여러 마을에 정착했다. 이들 마야인들은 보호 구역으로 지정된 왕실 토지를 사용할 수는 있었지만, 토지에 대한 소유권은 인정받지 못했다.[4]
영국 식민 정부는 간접 통치 정책의 일환으로, 스페인 식민 시절의 지방 정부 시스템에서 유래한 선출직 알칼데(시장) 제도를 도입하여 마야 공동체를 식민 행정 체계와 연결하려 했다. 그러나 남부에 정착한 모판족과 케크치족 마야인들은 거주 지역의 지리적 고립성과 자급자족적인 생활 방식 덕분에 북부의 마야인들보다 전통적인 생활 방식과 고유 언어, 강한 민족 정체성을 더 잘 유지하며 식민 사회에 덜 동화되었다. 반면 북부에서는 시간이 흐르면서 마야인과 스페인계 후손들의 구분이 점차 희미해지고 메스티소 문화가 형성되었다. 이처럼 19세기에 영국령 온두라스로 유입된 마야인들은 각기 다른 배경과 방식으로, 서로 다른 수준의 동화를 겪으며 토지를 잃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소수 민족으로서 식민 사회에 편입되었다.[4]
2. 2. 식민지 확립과 경제 발전 (1862-1931)

19세기 중반, 영국령 온두라스는 경제 불황과 마야인과의 갈등 심화라는 어려움에 직면했다. 주요 산업인 임업은 토지 소유를 소수의 유럽 독점 세력이 장악하면서 농업 발전과 경제 다변화를 가로막았다. 카리브해 다른 지역과 달리, 해방된 노예들이 토지를 소유하여 크리올 토지 소유 계급을 형성하는 것이 어려웠다. 대신 가리푸나족, 마야족, 메스티소 등이 토지를 임대하거나 불법 점거하며 농업을 개척했지만, 임업 이익 집단의 토지 지배는 농업 발전을 지속적으로 억압하고 많은 인구를 수입 식량에 의존하게 만들었다.[4]
마호가니 수출은 1846년 정점을 찍은 후 급감하여 1850년대 이후 경제는 장기 불황에 빠졌다. 이 불황은 구 정착민 계급의 쇠퇴와 영국 자본 및 토지 소유의 강화를 가져왔다. 특히 '영국령 온두라스 회사'는 다른 토지 소유주들의 희생을 발판 삼아 확장하며 주요 토지 소유주로 부상했다. 이 회사는 1859년 유한 회사로 등록되었으며, 이후 식민지 경제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4]
한편, 마야족에 대한 군사 원정 비용 증가는 불황 속 식민지 재정에 큰 부담을 주었다. 입법 의회는 토지 소유주와 상인 간의 이해관계 충돌로 마비 상태에 빠졌다. 토지 소유주들은 토지세에 반대하고 수입 관세 인상을 선호했으며, 벨리즈 타운의 상인들은 그 반대를 원했다. 또한 마호가니 캠프 보호 비용 부담을 놓고도 갈등이 벌어졌다. 이러한 교착 상태 속에서 입법 의회 의원들은 결국 정치적 특권을 포기하고 영국의 직접 통치를 받는 왕령 식민지 지위를 선택했다. 1871년 4월, 새로운 헌법이 발효되면서 부총독과 임명직 위원들로 구성된 입법 평의회가 식민지를 통치하게 되었다. 이는 권력이 기존 정착민 과두정치에서 영국 회사와 런던의 식민지 사무국으로 완전히 넘어갔음을 의미했다.[4] 1875년, 영국령 온두라스 회사는 런던에 본사를 둔 '벨리즈 부동산 및 생산 회사'(Belize Estate and Produce Company)로 재편되었고, 식민지 사유지의 절반가량을 소유하며 1세기 이상 영국령 온두라스의 정치 경제를 좌우하는 핵심 세력이 되었다.[4]
1890년경에는 스코틀랜드와 독일 출신 상인들이 상권을 장악하면서 영국 상품에 대한 의존도가 더욱 심화되었다. 유럽계 소수는 임명직 위주인 입법 평의회에서 대표성을 보장받으며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했다. 벨리즈 부동산 및 생산 회사의 매니저는 당연직 위원이었으나, 새롭게 부상하던 크리올 엘리트들은 정치 참여에서 배제되었다. 1890년 크리올인들이 선거를 통한 의회 진출을 요구했지만 거부당했고, 1892년 일부 크리올 위원이 임명되었으나 여전히 백인이 다수였다. 1894년 12월, 코르넬리우스 알프레드 몰로니 총독이 노동 조건 개선 청원을 거부하자 벨리즈 타운에서 수백 명의 노동자들이 폭동을 일으켜 상점을 약탈하고 경찰서에 수감된 노동 지도자를 석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4]
20세기 초, 미국 시장에서 치클(사포딜라 나무 수액으로 만든 껌 원료)과 목재 수요가 늘면서 임업이 잠시 활기를 띠었다. 치클은 주로 멕시코와 과테말라 숲에서 마야족 노동자들에 의해 채취되었다. 마호가니 거래도 잠시 호황을 누렸으나, 보존이나 재조림 없는 무분별한 벌채로 자원은 빠르게 고갈되었다. 사회적 불만도 계속되어, 1919년 7월에는 제대 군인들을 중심으로 수백 명이 벨리즈 타운에서 인종 차별과 물가 상승에 항의하는 폭동을 일으켰다. 1920년대에는 선출직 의회 도입 요구가 다시 제기되었으나, 총독에게 비상 권한을 부여하는 조건을 입법 평의회가 거부하면서 무산되었다.[4]
1930년대 이전까지 영국령 온두라스 경제는 전반적으로 정체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마호가니 거래는 부진했고, 사탕수수, 커피 등 다양한 작물을 이용한 플랜테이션 농업 시도도 실패했다. 1920년대 트랙터와 불도저 도입으로 서부와 남부 지역이 일부 개척되었지만, 이는 임업의 일시적 부흥에 그쳤다. 마호가니, 삼나무, 치클이 여전히 산림 생산의 97%, 총수출의 82%를 차지하는 등 경제는 미국 시장에 점차 편입되면서도 여전히 의존적이고 미개발 상태에 머물렀다.[4] 그러나 미국과의 무역 증가는 크리올 상인들의 성장을 촉진했다. Wrigley's에 치클을 납품하던 로버트 S. 터턴이나 금주법 시기 주류 밀매로 부를 쌓은 헨리 I. 멜하도 같은 인물들이 새로운 정치·경제적 실력자로 부상했다. 1927년에는 크리올 상인과 전문가들이 벨리즈 부동산 및 생산 회사 매니저를 제외한 영국계 토지 소유주 대표들을 밀어내고 입법 평의회에 진출했다. 이는 경제 침체 속에서도 사회 구조 변화가 진행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며, 1930년대 이후 본격화될 새로운 정치 시대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였다.[4]
2. 3. 현대 정치의 기원 (1931-1954)

대공황은 영국령 온두라스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으며, 실업률이 급증했다. 1931년 식민지 보고서는 주요 수출품인 마호가니와 치클 거래 중단으로 많은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었다고 기록했다. 설상가상으로 1931년 9월 10일, 1931년 벨리즈 허리케인이 벨리즈 시티를 강타하여 1,000명 이상이 사망하고 도시의 4분의 3 이상이 파괴되었다. 영국의 구호 활동은 늦고 미흡했으며, 영국 정부는 이 기회를 이용해 식민지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총독에게 입법 위원회의 동의 없이 법률을 제정할 수 있는 비상 권한인 '예비 권한'을 부여하려 했고, 입법 위원회는 반발했지만 결국 재난 지원을 받기 위해 이를 수용했다. 경제는 1932년과 1933년에도 계속 악화되어, 1933년 총 수입 및 수출액은 1929년의 4분의 1 수준으로 급감했다.[4]
벨리즈 부동산 및 농산물 회사(BEC)는 영국 정부와의 특별한 관계로 대공황 시기를 상대적으로 쉽게 넘겼다. 회사 주주이자 전 이사였던 사무엘 호어는 영국 내각 구성원이자 식민지 장관 레오 아메리와 친분이 있었다. 1931년, 회사가 어려움을 겪자 영국 정부는 미개척 마호가니 숲 지역과 20만달러의 대출을 제공하며 회사를 지원했다. 정부가 토지세를 인상하자 대규모 토지 소유주들은 납부를 거부했고, 정부는 세금 대신 가치 없는 토지를 받다가 결국 1935년 세금을 이전 수준으로 낮추고 체납액까지 소급하여 무효화했다. 반면 소규모 토지 소유주들은 더 높은 세율로 세금을 납부해야 했다.[4]
치클 수출로 부를 축적한 크리올 사업가 로버트 터턴은 1936년 입법 위원회 선거에서 BEC의 외국인 관리자인 C.H. 브라운을 꺾었다. 이는 미국의 상업적 연계를 가진 새로운 크리올 기업가 계층의 부상과 전통적인 영국 기업의 영향력 약화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4]
한편, BEC는 오렌지 워크 구의 산 호세와 얄박에 거주하던 마야인들을 강제로 이주시키고, 마호가니 캠프 노동자들을 거의 노예처럼 착취했다. 노동자들은 현금 대신 질 낮은 식량 배급과 매점에서만 사용 가능한 티켓을 받았고, 영양실조와 빚에 시달렸다. 1883년 제정된 '주인과 하인법'은 노동 계약 위반을 범죄로 규정하여 처벌했다. 1931년 존 버든 총독은 노동조합 합법화와 최저 임금 도입 제안을 거부했다. 실업과 허리케인 피해로 악화된 빈곤층의 고통은 1934년 일련의 시위, 파업, 폭동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현대 벨리즈 정치와 독립 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4]
1934년 2월 14일, "실업자 여단"이라 자칭한 그룹이 벨리즈 타운에서 행진하며 총독에게 요구 사항을 전달했다. 총독은 하루 0.1달러의 임금을 주는 돌 깨기 작업과 하루 2kg의 쌀 배급이라는 미미한 조치로 대응했다.[4] 실망한 실업자 여단 지도부가 물러나자, 안토니오 소베라니스 고메스(1897–1975)가 등장하여 "산 겁쟁이보다 죽은 영웅이 낫다"고 외치며 운동을 이끌었다. 1934년 3월 16일, 그는 노동자 및 실업자 협회(LUA)를 결성하고 대중 집회를 통해 총독, 부유층, BEC를 비판하며 구호와 최저 임금을 요구했다. 이는 새로운 민족주의적, 민주적 정치 문화를 형성하는 시작이었다.[4]
소베라니스는 1935년 새로운 선동법 위반으로 투옥되었지만, 노동 운동은 성과를 거두었다. 총독은 사회 불안을 막기 위해 도로 건설 등 구호 사업을 확대했다. 그러나 1935년 통과된 새 헌법은 부유층에게만 투표권을 부여하여 인구의 2%만이 선거에 참여할 수 있었다. LUA는 크리올 중산층 후보인 로버트 터턴과 아서 발데라모스를 지지하여 1936년 의회에서 야당 세력을 형성했다. 1939년 벨리즈 타운 위원회 선거에서는 노동계에 우호적인 중산층 크리올 후보들이 모든 의석을 차지했다.[4]
1930년대 투쟁의 가장 큰 성과는 1941년 노동조합 합법화와 1943년 '고용주 및 노동자 법' 제정이었다. 이 법은 노동 계약 위반을 형사 처벌 대상에서 제외하여 노동조합이 노동 조건 개선을 위해 활동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1943년 등록된 총노동자 연합(GWU)은 전국 조직으로 성장하여 1950년대 민족주의 운동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이처럼 1930년대는 억압적인 노동 환경과 권위주의적 식민 통치에 맞서 새로운 노동 및 정치 운동이 태동한 시기였다.[4]
같은 기간 동안 유권자 자격도 점차 확대되었다. 1945년 여성 유권자의 연령 제한이 30세에서 21세로 낮아졌고, 1949년 영국령 온두라스 달러 평가 절하로 재산 및 소득 기준이 완화되었다. 마침내 1954년, 독립 운동의 영향으로 문맹 여부와 관계없이 모든 성인에게 투표권이 부여되면서 헌법적 탈식민화 과정의 기초가 마련되었다.[4]
독립 운동의 기원은 1930년대와 1940년대에 활동했던 세 그룹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는 소베라니스의 LUA에서 시작되어 GWU로 이어진 노동자 계급 중심 그룹, 둘째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등장한 급진적 민족주의 운동 그룹, 셋째는 제한된 선거 제도 내에서 활동하며 투표권 확대를 추구했던 기독교 사회 행동 그룹(CSAG)과 같은 중산층 그룹이다.[4]
1947년, 가톨릭계 엘리트 학교인 세인트 존스 칼리지 졸업생들이 CSAG를 결성하여 벨리즈 시티 의회를 장악했다. 이 그룹의 일원이었던 조지 카들 프라이스는 이민 계획과 카리브해 식민지 연방 구상에 반대하는 여론을 등에 업고 1947년 선거에서 최다 득표를 기록하며 떠오르는 정치 지도자가 되었다. CSAG는 필립 골드슨과 리 리처드슨이 편집하는 신문 ''벨리즈 빌보드''를 창간하여 활동 기반을 다졌다.[4]
프라이스의 정치 경력과 인민연합당(PUP) 창당의 결정적 계기는 1949년 12월 31일 단행된 영국령 온두라스 달러 평가 절하였다. 영국 파운드화 평가 절하에 따라 총독이 약속을 어기고 비상 권한을 동원해 달러 가치를 낮추자, 입법부의 무력함과 식민 행정의 독단성이 드러나며 민족주의자들의 분노를 샀다. 또한 이는 미국 수입품 가격 상승으로 이미 어려움을 겪던 노동자 계급에게 더 큰 부담을 안기는 반면, 영국 파운드로 거래하는 BEC와 같은 다국적 기업의 이익을 보호하는 조치였기에 노동자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평가 절하는 노동자, 민족주의자, 크리올 중산층을 식민 행정에 반대하는 단일 세력으로 결집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평가 절하가 선언된 날 밤, 인민위원회가 결성되면서 초기 독립 운동은 급격히 성장했다.[4]
1950년 초, GWU와 인민위원회는 평가 절하, 노동 문제, 서인도 연방 구상 반대, 헌법 개혁 등을 요구하며 공동 집회를 열었다. GWU의 지원은 초기 독립 운동 성공에 필수적이었다. 1950년 4월, 인민위원회의 중산층 지도자들은 노동조합 지도부를 장악했고, 같은 해 9월 29일 인민위원회를 해산하고 인민 연합당(PUP)을 창당했다.[4]
1950년부터 1954년까지 인민 연합당(People's United Party, PUP)은 조직을 통합하고, 대중적 기반을 다지며, 주요 요구 사항을 명확히 했다. ''벨리즈 빌보드(Belize Billboard)''의 편집자 필립 골드슨과 레이 리차드슨은 PUP의 저명한 구성원이었으며, 반식민지 사설을 통해 당을 전적으로 지원했다. 1년 후, PUP의 서기 조지 프라이스는 GWU의 부회장이 되었다. 정치 지도자들은 연합의 힘을 이용하기 위해 연합을 장악했고, 그 결과 1950년대에 정치인들에게 점점 더 의존하게 되면서 연합 운동은 쇠퇴했다.[4]
PUP는 문맹 테스트가 없는 보편적 성인 선거권, 모두 선출된 입법 위원회, 입법부의 다수당 대표가 선택한 행정 위원회, 장관 제도 도입, 총독의 유보 권한 폐지를 포함한 헌법 개혁을 위한 선동에 집중했다. 요컨대, PUP는 대표적이고 책임 있는 정부를 추진했다. PUP에 대한 지지가 증가하자 식민 정부는 당의 주요 공개 플랫폼 두 곳을 공격함으로써 보복했다. 1951년 7월, 총독은 조지 6세의 사진을 전시하는 것을 거부하여 불충성을 보였다는 구실로 벨리즈 시티 의회를 해산했다. 그 후 10월, 총독은 리차드슨과 골드슨을 포함한 ''벨리즈 빌보드'' 발행인과 소유주를 선동 혐의로 기소했다. 총독은 그들을 12개월 동안 중노동에 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PUP의 지도자 존 스미스(John Smith)는 당이 공개 회의에서 영국 국기를 게양하는 데 동의하지 않아 사임했다. 4명의 주요 지도자 중 3명이 제거된 것은 당에 타격이었지만, 이 사건으로 프라이스는 강력한 위치에 있게 되었다. 1952년 그는 벨리즈 시티 의회 선거에서 득표율 1위를 차지했다. 박해와 분열에도 불구하고 불과 2년 만에 PUP는 강력한 정치 세력이 되었고, 조지 프라이스는 당의 지도자가 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4]
식민 행정부와 입법 위원회의 왕당파 회원으로 구성된 국민당은 PUP를 친 과테말라적이거나 공산주의자로 묘사했다. 그러나 PUP의 지도자들은 영국령 온두라스가 영국이나 과테말라에 속하지 않는다고 인식했다. 총독과 국민당은 당시 하코보 아르벤스 대통령의 민주적이고 개혁적인 정부에 의해 통치되던 과테말라와의 접촉 문제로 PUP의 명성을 훼손하려는 시도에 실패했다. 1954년 4월 28일, 보편적인 문맹 성인 선거권 하에 처음으로 치러진 선거에서 유권자들이 투표소로 향했을 때, 주요 쟁점은 분명히 식민주의였다. PUP에 대한 투표는 자치 정부를 지지하는 투표였다. 유권자의 거의 70%가 투표했다. PUP는 득표율의 66.3%를 얻었고, 새로운 입법 의회의 9개 선출 의석 중 8석을 차지했다. 추가적인 헌법 개혁이 분명히 의제로 떠올랐다.[4]
2. 4. 탈식민지화와 과테말라와의 국경 분쟁


영국령 온두라스의 독립 과정에는 두 가지 큰 어려움이 있었다. 하나는 1960년대 초까지 시민들에게 자치권을 부여하는 데 소극적이었던 영국의 태도였고, 다른 하나는 벨리즈 영토 전체에 대한 과테말라의 오랜 영유권 주장이었다.[4]
1961년, 영국은 마침내 식민지의 독립을 허용할 의사를 밝혔고, 1964년부터는 국방, 외교, 내부 치안, 공무원 임용 조건 등 필수적인 분야를 제외한 영역에서 자치권을 부여했다. 독립을 향한 움직임 속에서 1973년 6월 1일, 식민지의 이름은 공식적으로 '벨리즈'로 변경되었다.[4] 그러나 벨리즈의 미래를 둘러싼 영국과 과테말라 간의 협상은 지지부진했고, 결국 교착 상태에 빠졌다. 이에 벨리즈는 1975년부터 독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제 사회의 지지를 얻으려 노력했다.[4]
과테말라와의 영토 분쟁은 18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조약들은 스페인의 주권을 인정하면서도, 영국 정착민들이 인구가 희박하고 경계가 불분명한 지역에 계속 거주하는 것을 허용했다. 1786년 런던 협약은 스페인의 주권을 다시 확인했지만, 스페인은 1798년 이후 이 지역을 되찾으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과테말라 주장의 핵심 근거는 1859년에 영국과 맺은 조약이었다. 영국은 이 조약이 이미 영국의 지배하에 있던 지역의 경계를 명확히 한 것이라고 보았지만, 과테말라는 자신들이 카리브해 연안까지 이어지는 도로 건설을 영국이 지원하는 조건으로 영유권 주장을 포기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영국이 약속된 도로를 건설하지 않자, 과테말라는 1884년에 조약을 파기하겠다고 선언했지만 실제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4]
이 분쟁은 1930년대 호르헤 우비코 장군 정부가 도로 미건설을 이유로 1859년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면서 다시 불거졌다. 영국은 중앙아메리카 연방이나 과테말라 모두 과거 이 지역에 대한 실효적 지배를 한 적이 없으며, 19세기 영국의 존재에 항의한 적도 없으므로 벨리즈는 명백히 영국의 주권 하에 있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과테말라는 1945년 헌법에 영국령 온두라스를 자국의 23번째 주로 명시하며 영유권 주장을 공식화했다.[4] 1948년 2월, 과테말라가 침공 위협을 가하자 영국은 글로스터셔 연대 병력을 파견하여 대응했다.[4][10][11] 이후 1954년부터 들어선 과테말라의 군사 및 우익 정부들은 민족주의 감정을 자극하며 영유권 주장을 이어갔고, 1957년과 1958년에는 실제 침공 시도도 있었다.[4][5]
1961년 영국과 과테말라 간의 협상이 재개되었지만, 정작 당사자인 영국령 온두라스의 선출된 대표들은 참여하지 못했다. 1965년에는 미국 대통령 린든 B. 존슨이 중재에 나서, 과테말라가 신생 독립국의 내부 치안, 국방, 외교 등을 통제하는 내용의 조약 초안을 제안했으나, 이는 벨리즈 내 모든 정당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4][10]
1969년에 시작된 회담은 1972년 과테말라의 침공 가능성이 고조되면서 중단되었고,[6] 1973년 재개되었으나 1975년 다시 긴장이 고조되며 중단되었다.[5][11] 협상이 계속 실패하자, 1975년부터 1981년까지 벨리즈와 영국 정부는 과테말라 군사 정권과의 직접적인 협상 대신 국제 무대에서 지지를 호소하는 전략으로 전환했다. 자메이카에서 열린 영연방 정상회의, 페루에서 열린 비동맹 운동 장관 회의, 그리고 유엔(UN) 총회 등에서 벨리즈의 자결권을 주장했다.
특히 비동맹 운동의 지지는 결정적이었으며, 이는 유엔에서의 성공으로 이어졌다.[4][10]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은 처음에는 과테말라를 지지했지만, 쿠바, 멕시코, 파나마, 니카라과 등이 벨리즈 독립 지지로 돌아서면서 과테말라는 점차 고립되었다.[4][10] 마침내 1980년 11월, 유엔 총회는 과테말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벨리즈의 모든 영토를 보전한 상태에서의 독립을 지지하는 결의안을 압도적으로 통과시켰다.[4][10]
독립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과테말라와의 합의를 위한 시도가 있었고, 1981년 3월 11일 헤즈 오브 어그리먼트(Heads of Agreement)라는 잠정 합의안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과테말라 정부는 내부 반발 등으로 이를 비준하지 않고 협상에서 철수했으며, 벨리즈 내에서도 야당이 이 합의안에 반대하며 폭력 시위를 벌였다. 결국 과테말라와의 최종 합의 없이, 1981년 9월 21일 벨리즈는 독립을 선언했다.[4] 하지만 독립 이후에도 과테말라와의 영토 분쟁은 해결되지 않은 채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4]
3. 정치
1884년 이전 영국령 온두라스의 식민 행정은 체계적이지 못했다. 초기 정착민들은 뉴잉글랜드의 타운 미팅과 유사한 공개 회의를 통해 자치적으로 운영했다. 1765년에는 '번나비 법전'이라는 규정이 채택되어 1840년 집행 위원회가 설립될 때까지 효력을 유지했다. 1840년에는 공식적으로 영국령 온두라스로 명명되었으나, '벨리즈'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1853년에는 공개 회의 시스템이 폐지되고, 제한된 선거권을 가진 일부 주민이 참여하는 입법 의회가 설립되었다. 이 의회는 1784년에 처음 임명된 영국 감독관이 주재했다.
1749년부터 1884년까지 영국령 온두라스는 영국령 자메이카 식민지의 종속 영토로서 관리되었다. 1871년 왕령 식민지로 지정되면서, 기존의 감독관 대신 자메이카 총독 아래의 부총독이 파견되었고, 선출직 입법 의회는 임명직 입법 평의회로 대체되었다. 1884년에는 자메이카 행정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독자적인 총독을 맞이하게 되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정치 참여가 점진적으로 확대되었다. 1935년에는 소득 자격 요건이 완화되어 입법 선거권이 확대되었고, 1954년에는 성인 보통 선거권이 도입되어 입법부의 다수 의석을 선출직 의원이 차지하게 되었다. 1961년에는 장관 제도가 도입되었으며, 1964년에는 자치 정부 지위를 획득하여 내부적인 통치 권한을 확보했다.
4. 경제
임업은 영국령 온두라스 경제의 중심이었다. 초기에는 염료로 사용되는 로그우드가 주요 생산품이었으나, 1770년대 가격 하락 이후 마호가니 벌채로 전환되었다. 마호가니는 20세기 중반까지 식민지 경제를 지배했다. 마호가니 벌채는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주로 영국의 다른 카리브해 식민지에서 아프리카 출신 노예를 대규모로 수입했다. 노동 환경은 매우 열악했으며, 이로 인해 1765년부터 1820년까지 총 네 차례의 노예 반란이 일어났다. 노예제는 1838년에 최종적으로 폐지되었다.
식민지의 불리한 세금 정책과 무역 제한으로 인해 상업적 농업은 수익성이 낮았고, 경제는 마호가니 수출에 크게 의존하는 구조를 유지했다. 1860년대에 식민지 당국은 남북 전쟁 중과 이후 미국 남부(특히 루이지애나) 출신 이주민들에게 인센티브를 제공했다. 이들 남부 연합 출신 정착민들은 식민지에 대규모 설탕 생산을 도입했고, 이전에는 성공하지 못했던 상업적 농업 분야에서 수익을 창출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경제의 다변화가 부족하여 식민지는 마호가니 시장의 변동에 매우 취약했다. 1930년대의 대공황과 1931년에 발생한 파괴적인 허리케인은 경제와 이미 낮은 생활 수준을 더욱 악화시켰다. 임업은 1914년부터 꾸준히 쇠퇴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1939년–1945년) 중 잠시 부흥기를 맞기도 했지만 전반적인 하락세를 막지는 못했다. 1950년대에 이르러 농업이 마침내 경제의 주된 부분이 되었고, 1970년대에는 어업의 중요성도 커졌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시행된 토지 개혁은 이러한 농업 및 어업 중심의 경제 확장에 기여했다.
5. 인구
1790년 식민지 인구 조사에 따르면, 영국령 온두라스 인구의 4분의 3은 크리올이라고 불리는 혼혈인이었다. 이들은 주로 유럽인 남성(영국인, 포르투갈인, 스페인인, 프랑스인)과 노예화된 아프리카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후손으로, 벨리즈 크리올의 조상이 되었다.
1807년 노예 무역이 폐지된 이후, 높은 사망률과 낮은 출산율로 인해 아프리카계 인구 비율은 점차 감소했다. 반면 백인 인구 비율은 약 10% 수준을 꾸준히 유지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인구 구성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 것은 메스티소로, 현대 벨리즈 인구의 약 50%를 차지한다. 마야인 역시 계속해서 벨리즈에 거주하며 인구의 약 11%를 구성하고 있다.
식민지 시기 영국령 온두라스의 인구는 비교적 적은 수준이었으나 꾸준히 증가했다. 시대별 인구 변화는 다음과 같다.
연도 | 추정 인구 |
---|---|
1790년 | 약 4,000명 |
1856년 | 약 20,000명 |
1931년 | 50,000명 초과 |
1946년 | 약 60,000명 |
1970년 | 약 120,000명 |
1980년 | 145,000명 초과 |
참조
[1]
웹사이트
Uniformity and Co-Operation in the Census Methods of the Republics of the American Continent
https://archive.org/[...]
American Statistical Association
2013-12-26
[2]
웹사이트
CARICOM – Member Country Profile – BELIZE
http://www.caricom.o[...]
2015-03-19
[3]
서적
Understanding Belize: A Historical Guide
Harbour Publishing
[4]
문서
Belize: Historical Setting
https://web.archive.[...]
Library of Congress
1992-01-01
[5]
웹사이트
British Honduras
http://britains-smal[...]
2014-04-15
[6]
서적
Phoenix squadron
Bantam Press
2010
[7]
웹사이트
Uniformity and Co-Operation in the Census Methods of the Republics of the American Continent
https://archive.org/[...]
American Statistical Association
2013-12-26
[8]
웹사이트
CARICOM - Member Country Profile - BELIZE
http://www.caricom.o[...]
2015-03-19
[9]
서적
Understanding Belize: A Historical Guide
Harbour Publishing
[10]
문서
Belize: Historical Setting
https://web.archive.[...]
Library of Congress
1992-01-01
[11]
웹사이트
British Honduras
http://britains-smal[...]
2014-04-15
[12]
서적
Phoenix squadron
Bantam Press
2010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